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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기사> 조선일보 [만물상] 고려장(高麗葬)의 오늘
관리자
2004-12-02 오후 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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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고려장(高麗葬)의 오늘

한삼희 논설위원 shhan@chosun.com 


입력 : 2004.11.15 17:39 15'


역 대합실에 노파가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다. 주위 사람들이 물어도 뭐라 대답이 없다.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조사해도 다문 입은 열릴 줄 모른다. 어떤 아이가, 그 할머니는 어느 아주머니가 버리고 갔다고 말해준다. 경찰이 그 여인을 찾아 맞대질시키겠다며 소동을 벌인다. 그 사이 할머니는 알약을 입에 넣고 영원히 잠든다. 경찰은 “맞대질시킨다는 말을 마는 건데…”라며 시신을 수습한다.(송하춘의 단편 ‘청량리역’)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널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구나. 내가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널 보고 싶구나.’ 서울 한 복지원의 벽에 붙은 시(詩) 아닌 시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한 할머니가 써붙인 것이다. 매주 한 차례씩 이곳을 찾아 목욕봉사를 한다는 어느 주부는 그 글을 발견하고는 목이 메어 버렸다. 남의 손에 자기를 맡겨 버린 자식이다. 그 자식을 보고 싶다며 그리워하는 할머니에게서 끊어지지 않는 부모의 사랑을 본다. 

병든 부모를 요양병원에 모셔다 놓고는 연락을 끊어 버리는 현대판 고려장(高麗葬)이 늘고 있다고 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복지시설에 맡기면서 ‘어머니인 것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 할머니들은 아무리 물어도 자식에 대해선 한마디 대답이 없다고 한다. 혹여 그 자식에게 해라도 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쓰여서일 것이다. 

칠십 중반의 할머니가 아들 3형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나를 돌봐주지 않으려면 부양비라도 달라는 것이다. 법원은 3형제가 합쳐서 월 200만원씩 드리라는 판결을 했다. 작년 연말의 일이다. 자식은 금덩이처럼 키우는 신세대들이 하나뿐인 부모는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형제 간에 다투는 세상이다. 자식이 노인을 방치하거나 유기할 경우 징역 5년에 처한다는 법이 마련돼 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게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오늘 모습이다. 

부모의 크고 깊은 은혜에 대해 가르치는 불경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메고서 살갗이 닳아 뼈에 이르고 뼈가 패어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능히 다 갚지 못하느니라….’ 세상에 어버이 없는 자식은 없다. 아무리 찬바람 몰아치는 세상이라 해도 우리를 있게 해준 부모와의 연을 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 모두도 부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