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관련사례
참으로 그리운 지옥입니다
관리자
2005-09-01 오후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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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한줄기 마른 잎사귀 같던 어머니는 싸락눈처럼 생의 흔적을 지우셨습니다. 
당뇨와 합병증으로 몸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었던 당신. 허나 정작 어머니의 가장 큰 고통은 사기를 당해 평생 일궈온 재산을 한순간에 날린 채 하루하루를 술로 분을 삭혀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해 12월, 예순 살의 홀아비와 서른 중반의 노총각은 시골변두리 18평짜리 빌라에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아버지, 이제 술 그만 끊고 건강하셔야 해요. 제가 빚 다 갚고 재기하시도록 도와드릴께요.”어머니를 선산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거죽만 남은 아버지의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그래 이젠 내가 술 안 먹는다. 너두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지.”입안 가득 알코올내를 풍기는 아버지의 눈가에 또다시 핏빛 눈망울이 맺혔습니다. 저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압니다. 먼저 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안쓰러움... 아버지의 눈빛엔 지난 세월의 회한이 짙게 남아 있었습니다. 
한동안 아버지는 술을 찾지 않으셨고 저 역시 집안일을 도맡으며 직장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쪼개고 쪼개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아버지와 오빠 걱정에 결혼을 미뤄두었던 여동생도 등 떠밀 듯 출가시키고 더 열심히 직장과 집을 오가며 제 삶의 희망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치스런 생각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느 날인가부터 또다시 술을 입에 대셨습니다. 동네 노인들의 권유에 못 이겨 한잔, 두잔 술을 입에 댄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안방 여기저기서 술병이 굴러 나왔습니다. 이불 밑, 장롱, 서랍장, 심지어는 옥상과 화단에까지 아버지는 제 눈을 피해 술병을 감춰놓으셨습니다. 허나 저는 아버지가 숨겨놓은 술병을 용케도 잘 찾아내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한밤중 제 방에서 잠을 자다가도 아버지가 몰래 술을 한 모금 넘기는 소리까지 듣고는 안방으로 달려가 실랑이를 벌인 적도 다반사였습니다. 저에게 들켜 술병을 모두 빼앗긴 날이면 아버지는 식사도 거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꼼짝도 않으셨습니다. 술병을 빼앗고 다투기도 하고 때론 화가 나 술병을 방바닥에 내던지기도 수차례. 그렇게 아픔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엉킨 실타래 풀어가듯 하던 삶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저 역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차려놓은 식사는 늘 저녁이 되어도 아침에 차려놓은 그대로 제 마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예상치 못했던 검은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2003년 8월 어느 여름날,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해 현관으로 들어서려던 저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거실불은 모두 꺼져 있고 안방 여기저기 흐트러진 집기류와 휴지조각, 그리고 방 한 귀퉁이에서 아버지가 넋 나간 사람마냥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밤 아버지는 제게 가장 슬픈 모습을 남기셨습니다.
“알코올성 치매입니다. 장기간 알코올 섭취로 인해 뇌손상이 치명적이라 일반 노인성 치매와 달리 호전되기를 바라기는 힘듭니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합니다.”다음날 정신병원을 찾은 저는 전문의로부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누나와 여동생에게 연락을 하고 모처럼 3남매가 모인 집안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셨던 누나와 막내딸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초점 없는 눈빛을 건네시는 아버지를 보며 우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나와 여동생의 염려가 있었지만 일단 제가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허나 그 판단이 얼마나 무책임한 감상(?)이었던가를 깨달은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밥과 찌개, 반찬을 만들고 아버지를 깨워 기저귀를 갈고 손수 밥을 떠먹여드린 후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잠근 채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딸깍” 현관 열쇠가 채워질 때마다 저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불안함으로 마음 한켠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면 저는 외근을 핑계 대며 서둘러 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30분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며 일단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고맙게도 전화벨 소리에 반응해서 “예” 낮은 음으로 아버지가 답변하시면 어찌나 고맙고 기쁜지... 집에 도착해서는 일단 어질러진 안방을 치우고 오전 내 흥건해진 기저귀를 갈아드립니다. 다행히 기저귀를 벗어던지지 않은 날은 그래도 이불을 버리지 않아 수고를 덜게 되는 날입니다. 이어 점심식사를 챙겨드리고 저녁에 돌아오기 전까지 드실 간식거리를 머리맡에 마련한 후 TV를 켜드리고는 또다시 일을 나섭니다. 여기까지는 그리 어려울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모든 어려움은 퇴근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7시를 넘겨 퇴근하게 되면 집안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어있습니다. 방안 가득 잡동사니가 널려 있고 여기저기 대소변이 가득합니다. 주저앉고 싶고 맥이 탁 풀리지만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할일, 서둘러 사방 벽에 묻은 대소변을 닦아내고 이불과 아버지의 속옷, 겉옷을 벗겨 손빨래를 한 후 세탁기를 돌립니다. 이어지는 목욕시간, 일단 불안해하는 아버지의 손을 이끌어 양변기 위에 앉혀 드리고 양치질과 면도를 해드립니다.(간혹 양치물을 삼키는 경우가 있어 턱을 잡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따뜻한 물을 양동이 가득 받아 상체를 닦아드립니다. 이어 잠시 일어서서 세면대를 붙잡게 해드리고는(치매에 걸리신 분들은 움직일 시에 뭔가를 꽉 붙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등을 밀어드리고 하체를 닦아드립니다. 이어 다시 양변기 위에 앉혀드리고는 발마사지를 해드립니다. 마무리는 항상 머리와 얼굴에 천천히 물을 붓고는 샴푸와 비누로 닦아내어 드립니다. 혹시나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될까 해서 두피마사지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때 타월로 문질러도 닦아지지 않던 발바닥의 굳은살은 아직도 제 손끝에서 저릿저릿한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맙게도 목욕은 한순간 원망스럽고 빨리 돌아가시기만을 기대했던 제게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그래도 순탄한 기억입니다. 어느 날엔가는 한밤중 화장실을 가려다가 현관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는 동네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옷을 뒤집어 입은 채 쪼그리고 앉아있던 아버지를 발견하기도 했고 일이 늦어 집에 조금이라도 늦은 날에는 냉장고에 있던 무며 양파를 껍질째 씹어 드신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루는 참기름인가를 한 병 다 드시고는 며칠째 속앓이를 하신 적도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밤마다 주무시지 않고 거실과 안방을 오가며 소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기저귀를 풀고 대소변을 여기저기 보아두신 탓에 하루밤새 목욕을 서너 번씩이나 시켜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더럽혀진 이불이며 수건과 속옷을 서너 차례나 빨아대야 하는 탓에 저 역시 하루가 다르게 지쳐갔습니다. 남들은 쉽게 요양시설로 모시라고 했지만 자식들 누구 하나 여유가 없었던 탓에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전문 요양시설엔 전화만 걸어보고는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연찮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무료 요양시설을 추천받았건만 정작 누나와 함께 찾아가보고는 열악한 그곳 시설을 보고는 둘 다 눈물과 한숨만 짓고는 아버지를 그곳에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누나와 동생이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돌보고 손녀들까지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용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는 동안 저는 제 스스로 치매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치매에 관한 의학정보를 체득하고 때론 치매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가족들의 얘기도 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일련의 정보와 저보다 더 힘겨운 시기를 버텨내고 계시는 분들의 얘기가 아버지와 제 삶에 얼마나 귀중한 잣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 치매노인들에게 필수적인 성인용 위생팬티와 좌변기, 방수형 깔개 등을 저렴하게 파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맙게도 제 아버지는 의사의 호전가능성이 불가하다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해 겨울 상태가 호전되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셨습니다. 흐릿한 기억이나마 아버지의 유년기는 물론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우리를 낳고 기르기까지 세세한 부분을 기억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갑작스레 간경화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기를 반복하며 또다시 생의 고비를 맞게 되셨습니다. 급기야 지난해 가을 어머니의 기일을 1달 앞두고 아버지는 끝내 고통 많던 세상의 짐을 훌훌 털어놓으신 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18평짜리 빌라에서 떨어져 나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그 보금자리에 들어가 안방을 둘러보곤 합니다. 벽면에 묻은 아버지의 대소변 자국, 냄새, 그리고 아버지가 목욕할 때마다 앉아계셨던 변기통과 발바닥의 굳은살을 힘겹게 밀어내던 때수건까지 아버지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것을 흑백사진 보듯 훑고 나면 금새 눈두덩이 뜨거워집니다.

하늘아래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 하나 할까요? 전 하루가 힘겹고 아버지가 귀찮아지면 목욕을 시켜드린다거나 옷을 갈아입혀드리며 짜증을 내고 차가운 물을 끼얹고 때론 멱살을 잡고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자식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었던가를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기억 못하던 시절... 아버진 평생의 반려자와, 끔찍이 사랑했던 누나, 여동생, 손녀들의 이름은 기억하질 못해도 제 이름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진지를 떠먹여드리다가도 “아버지 내 이름이 뭐지?” 하고 물으면 멍한 눈빛으로 답변하시던 당신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아버지와 저, 단 둘만이 함께 했던 그 시간이 제겐 참으로 그리운 지옥입니다...